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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에 별빛처럼 빛난 자들"의 저자에 대해 알아보고 책 속에 소개된 몇몇 인물들에 대해 알아보려고 합니다.

    저자 소개

    저자 강부원은 성균관 대학교 동아시아학술원 연구원으로 근무했으며 현재는 성균관대, 한양대, 방송대 등지에서 강의하며 학생들과 문학. 문화와 역사에 대해 논하고 있습니다. 저자가 지은 책으로는 "역사에 불꽃처럼 맞선 자들", " 팽목항에서 불어오는 바람(공저)", "기계 비평들(공저)". "진격의 독학자들(공저)" 등이 있습니다. 

     

    책 소개

    "역사에 별빛처럼 빛난 자들"은 세상의 가장자리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흐름과 분위기를 만들어낸 반짝이는 자들이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우뚝 세운 이야기입니다. 책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경쟁에 매몰된 세상에서 스스로의 삶을 가꾸고 정돈하며 남을 위한 희생과 헌신도 마다하지 않은 존재들이며 척박한 영토를 개척하며 수백 번 넘어져도 스스로 다시 일어서는 인물들입니다.  이 책에 소개하고 있는 인물들은 한낮의 태양처럼 강렬하고 뜨겁진 않지만 밤하늘을 수놓은 별들처럼 은은하게 반짝이는 사람들이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사회, 문화, 예술, 교육 방면에서 활동했던 공통점을 지니고 있으면 괴짜 혹은 별종으로 불렸지만 돌아보면 시대를 앞서 간 선구자임을 책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책 속에 인물

    김향안: 세상 밖으로 자유롭게 날아간 신여성

    1950~1960년대 상상조차 하지 못할 정도의 진취성과 개방성을 보여주며 남다른 예술적 행보를 거듭한 김향안은 많은 여성에게 자유를 향한 희망을 꿈꾸게 해주는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녀는 누가 뭐래도 스스로 찬란히 빛나는 별이었다
    (본문중에서)

     

    천재 시인 이상의 마지막 여인, 변동림.  결핵을 앓고 있는 이상의 절절한 고백에 변동림은 외면하지 않고 이상과 결혼을 하였고 그의 마지막을 함께 한 여인입니다.  사별 후에 더욱더 자유롭고 주체적인 삶을 산 그녀는 평생의 반려자 김환기를 만나고 김향안으로 변신합니다.  전처와의 사이에 아이가 셋인 화가 김환기와의 결혼은 부모의 반대가 심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을 강행했고 하얀 드레스를 입은 결혼식은 당시로서는 파격 그 자체였습니다.

    그녀는 평생 김환기를 아내를 살았지만 안목 높은 미술비평가였습니다. 그녀는 항상 남편 김환기보다 용기 있게 현실을 박차고 먼저 나섰습니다. 한국 전쟁이 끝나고 비행기 편도 마땅히 없을 때 프랑스 파리를 먼저 유학을 떠난 그녀는 먼저 자리를 잡고 있을 테니 곧 따라오라면 남편에게 씩씩하게 말하고 떠날 정도로 당찬 여성이었습니다. 

    그 후에도 남편 김환기가 그림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오롯이 혼자 생계를 책임졌다고 합니다. 동양의 낯선 나라에서 온 체구 작은 여성이 서양 예술계의 주류 질서에 도전하는 모습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 줬으며 유럽과 미국에서 김환기가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게 된 것 또한 김향안 덕분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합니다.

     

    1950년대 파리에서 활동 후 1960년 대부터 죽기 전까지 뉴욕에서 생활을 합니다. 1974년 김환기가 세상을 떠난 후 김향안은 남편과 살았던 허름한 아파트에서 30년을 더 혼자 살았다고 합니다. 남편이 죽은 후 모든 것을 잃은 듯 헛헛했지만 곧 마음을 추스르고 1978년 환기재단을 설립했고 1992년 환기 미술관을 지었습니다. 

    남편 사별 후 그녀는 단 한 번도 세상에 초라한 모습을 보여 준 적이 없습니다. 그녀 덕택에 김환기의 이름은 한국 근대 미술사의 한 페이지에 더욱 뚜렷하게 각인되었습니다. 김환기를 세계 미술 시장에서 한국 화가로선 유례없는 가치를 인정받도록 만든 사람이 바로 그녀 김향안입니다.

     

    지금도 여전히 김향안은 누군가의 연인이자 어느 예술가의 조력자로 더 많이 호명되고 있지만 그녀는 스스로 선택한 사랑을 위해 모든 걸 내던지고 자신이 행산 사랑에 끝까지 책임을 다하는 주체적인 신여성이었습니다.

     

    김벌래:한국 음향 기술계의 소문난 괴짜

    소리 만들기 시작은 듣는 것에서부터 

     

    김벌래는 평생 신나게 사는 게 목표이자 꿈이었던 사람입니다. 미치도록 즐기고 일을 통해 행복을 얻는다면 부와 명예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었고 '음향'이라는 한 분야에만 푹 빠져들어 평생 골몰했으며 원하는 소리를 만들어 낸 뒤 스스로가 마음에 들고 사람들이 기뻐하고 즐기면 그것으로 족했다고 합니다. 그래서인 김벌래는 자연스럽게 한국 음향계 최고의 자리에 올라 '음향의 달인'이자 한국 최고의 '소리 디자이너'란 칭호를 얻게 됩니다.

     

    1941년 경기도 광주의 가난한 집안에 태어난 김벌래는 제대로 먹지 못해 신체 발달이 또래에 비해 뒤쳐졌습니다. 어려운 형편 탓에 중학교만 겨우 졸업한 뒤 무작정 서울로 올라와 체신 고등학교 통신과에 들어가 졸업을 한 후 우체국에서 근무를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연극배우가 되고 싶었고 우체국에 근무하면서 '동인 극단'에서 최불암, 오지명 등과 함께 활동했습니다. 주연 배우로 무대에 서고 싶었으나 158cm의 키에 43kg밖에 나가지 않았던 왜소한 체격 때문에 번번이 주요 역할에서 밀려났습니다. 무대 뒤에서 허드렛일만 맡던 중 음향을 다루게 되었는데 이는 체신고 통신과 시절 여러 기계 장비를 만져 익숙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극단에서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지 선배들이 극단 이곳저곳에서 눈에 띈다고 '벌레'라고 하였고 후에 그 별명이 마음에 들어 본명은 '김평호'였으나 아예 이름을 '김벌레'로 고쳤다고 합니다.

     

     1962년 동아방송 개국 멤버로 제작부 음향 PD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벌레'라는 이름이 자막에 올리기에는 징그럽다며  이름을 살짝 고쳤는데 그게 바로 '김벌레'가 '김벌래'가 된 사연입니다. 

     

    한국 광고 소리의 90%는 그가 만들었다고 과언이 아닙니다. 만화 영화 로봇 태권브이, 펩시 본사에서도 놀란 병 따는 소리, 브랜 닥스 치약의 뽀드득, 종근당 제약 광고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종소리, 트라이 속옷 광고의 이덕화가 문 두리는 소리 등이 그의 대표작입니다.

     

    1986년 아시안 게임, 1988년 올림픽 게임, 1991년 세계잼버리대회, 1993년 대전 엑스포, 2002년 한일 월드컵, 14대부터 16대까지 대통령 취임식에서도 음향 총괄을 담당했으며 2만여 편의 광고 및 방송 음향 효과에 관여했으며 수백 편의 영화와 드라마에도 음향감독으로 이름을 올렸습니다. 

     

    김벌래는 죽기 전까지 음향 제작 일을 즐겼고 대학에서 광고와 음향 강의를 꾸준히 맡았습니다. 동년배 음향 감독들이 신시사이저 같은 새로운 장비의 출현을 달가워하지 않았던데 반해 그는 첨단 장비를 익히고 사용하는 데도 게을리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노년엔 드라마와 연극에도 출연하며 젊은 시절 이루지 못했던 배우의 꿈에 도전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는 일평생 신나게 일한다는 모토로 살아왔으며 음향 작업을 돈벌이가 아니라 장난처럼 즐겁게 하는 일로 생각했습니다. 죽기 전까지  '소리의 장인'이란 거창한 호명보다 '벌레'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게 더 좋다고 말했습니다.

    세상은 변했지만 그가 만들어낸 소리들은 여전히 우리에게 새롭고도 익숙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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